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지명유래

 구산면

구산면은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속한 면이다. 


구산면 행정 구역

  • 유산리(柳山里)
  • 마전리(麻田里)
  • 석곡리(石谷里)
  • 수정리(水晶里)
  • 내포리(內浦里)
  • 옥계리(玉溪里)
  • 반동리(盤洞里)
  • 구복리(龜伏里)
  • 심리(深里)
  • 난포리(藍浦里)

지명유래


유산리(柳山里)


유산리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 버드나무나가 많아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윗 유산은 산세가 좋았던지 거기 집단 해 살던 윤씨문(尹氏門)에서 칠원군수가 나셨다. 아래 유산을 유천(柳川)이라고 한다. 윗 마을엔 칠원윤씨, 상주주씨가 아래 마을엔 경주최씨, 인동장씨가 대표되는 성씨로 거주하고 있다.

정조 13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칠원현 구산면에 속한 입석리로 기록되어 있다. 입석리가 왜 유산리로 바뀌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유산과 유촌이란 지명은 윗의 유산에 의한 것이다. 높은 산쪽에 있는 곳은 유산이 되고, 하천쪽에 자리한 곳은 유촌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유촌은 하유산, 유산은 상유산이라 불렀다. 한다.






마전리(麻田里)

마전은 글자 그대로 삼밭이다.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盆地로 되어 있어 바람세가 적고, 땅이 기름져 예부터 삼을 많이 심어 주 생업으로 했음으로 麻田이라 이름 하였다.
이 마을엔 이씨가 입주하기 전에는 신녕여씨가 임란 전에 들어와서 제법 잘 산 것 같다는 전언이다. 그것을 증명할만한 것은 마을 북쪽의 벌판에서 기와, 토기, 도기 등의 유물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는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남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할 때 인지라 왜구를 피해 모든 재산을 땅에 묻어두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군묘가 있다기에 찾았더니 그는 임진왜란 때부터 충무공의 副尉로 있었던 장군으로 丁酉再亂 때 충익공 곽재우 장군과 함께 창녕 火旺山 전투에서 전사하신 함안의 순흥안씨의 묘소였는데 묘비는 하도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史蹟을 알아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호는 楓灘亭이다.
또 全州李氏 上祖 折衝將軍 묘소도 있다.그리고 마을 앞의 넓은 갯벌은 예부터 鹽田으로 쓰여 졌다고 하나 그 역사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마전리(麻田里)은 예로부터 삼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마전리가 속한 지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산현의 마전포로 확인되며, 『호구 총수』에 칠원현 구산면의 마전포리(麻田浦里)로 동명이 확인된다. 1895년(고종 32)에는 칠원군 구산면에 속했으며, 1908년에는 창원부에 속했고,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창원군 구산면의 법정리인 마전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마산합포구 구산면 마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마전리는 남쪽으로는 남해와 접해있으며, 그 외의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예로부터 산사면을 따라 삼을 많이 심었다고 하며, 남쪽의 해안으로는 넓은 갯벌이 있다. 북쪽의 산지에서 흘러내린 소하천은 남쪽 해안으로 유입하며, 취락은 소하천을 따라 발달해 있다.

현황
마전리는 구산면의 북서쪽 끝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유산리와 석곡리가 있다. 남쪽 해안선을 따라 해안 관광로가 통과하며, 구산 초등학교 구선 분교가 있다. 관내의 마을은 상마전 마을과 하마전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마전리의 세대수는 125호에 인구수는 남자 131명, 여자 118명 총 249명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 [경상남도 마산시 구산면]마전리 [麻田里, Majeon-ri]|작성자 한맹

석곡리(石谷里)

석곡리(石谷里)는 돌이 많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석곡리가 속한 지역은 『호구 총수』에 철원현 구산리의 석곡리와 구령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했다가, 1908년 창원부에 속하였으며,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창원군 구산면의 법정리인 석곡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마산합포구 구산면 석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석곡리는 서쪽으로는 남해와 접하며 해안으로 돌출된 큰 끝대가 있고, 동쪽과 남쪽 및 북쪽에는 산지가 발달해 감싸고 있다. 동쪽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남쪽과 북쪽 산지 사이를 관통하여 흐르며 북서쪽으로 흘러 남해로 유입하며, 시가지는 소하천변을 따라 발달해 있다.

현황
석곡리는 구산면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유산리, 동쪽으로는 수정리, 남쪽으로는 내포리와 접하고 있다. 석곡리는 약 300여 년 전 입향한 밀양 박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석곡리 서쪽 산에서는 일제 강점기 화장품 원료로 반출되었던 양질의 백토(白土) 광산이 있었는데 현재는 광맥이 고갈되어 폐광하였다. 서쪽 해안선을 따라 해양 관광로가 남북으로 관통하며, 북쪽과 남쪽 산지 사이로는 석곡로가 동서로 통과한다.

관내에는 군령 마을·명주 마을·석곡 마을이 있다. 석곡 마을은 윗 석골과 아랫 석골 마을로도 불려진다. 2013년 3월말 기준 석곡리의 세대수는 168호에 인구수는 남자 192명, 여자 171명 총 3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 [경상남도 마산시 구산면]석곡리 [石谷里, Seokgok-ri]|작성자 한맹

수정리(水晶里)

앞 바다가 잔잔한 호수와 같고 水晶과 같이 그 물이 맑으므로 水晶이라 이름 하였다.(현재는 약 7만평이 매립되어 앞 바다가 거의 없어지다)
옛날엔 정호개(晶湖浦)라고도 불리었다.
본 면 행정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학교 등의 관공서가 집결되어 있다. (1922년 면사무소가 현동에서 이전됨)
본 마을은 섭동으로 죽전, 안녕, 장문안, 골매를 끼고 있으며 주민의 생업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예부터 본동엔 土俗信仰으로 마을의 연례행사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흣날 丑時에 事前에 祭官을 嚴選하여 洞神祭를 올려 그해의 동민의 安家太平과 時和年?을 祈願하고 있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앞 바다가 잔잔한 호수와 같고 수정(水晶)과 같이 그 물이 맑아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수정리가 속한 지역은 『호구 총수』[1789]에서 안령포리와 수정포리로 지명이 확인되며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다. 1908년에는 창원부에 속하였으며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창원군 구산면의 법정리인 수정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수정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수정리의 동쪽은 수정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북으로는 산지가 감싸고 있다. 동쪽 해안가에는 매립된 평지가 발달해 있다. 서쪽의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으로 흘러 수정만으로 유입한다.

현황
수정리는 구산면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으로는 유산리, 서로는 석곡리, 남으로는 내포리·옥계리와 접해 있다. 해안가를 따라서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동·서로는 석곡로가 통과해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향한다.

수정리는 구산면 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의 공공 기관과 구산 초등학교, 구산 중학교, 구산 분교 등 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구산면의 중심지이다. 관내의 자연 마을로는 섭동, 죽전, 안녕, 장문안, 골매가 있으며 주민의 생업은 어업과 농업이다. 수정리의 본동 마을인 섭동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축시(丑時)[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2013년 3월말 기준 수정리의 세대수는 552호에 인구수는 1,259명[남 619명|여 640명]이다.
[출처] [경상남도 마산시 구산면]수정리 [水晶里, Sujeong-ri]|작성자 한맹


내포리(內浦里)

바다에 접하고는 있으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마을이 앉아기에 안개(內浦)라고 명명되었다.
예부터 星山 李氏門과 晋陽 姜氏門이 勢를 겨누며 살았던 마을이다. 그 외 金海金氏, 南陽洪氏, 咸安趙氏, 東萊鄭氏 등이 산다.
李氏門에서는 吏曹參判과 水軍兵馬節度使가 났고, 姜씨 門에서는 3형제가 효행이 卓越하여 旌閭되어 三孝閣이 세워졌고, 都事와 承旨의 벼슬도 났다.
또한 金氏門에선 忠孝烈 旌閭閣이 서있다(마산시 회원동 28번지소재)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내포리(內浦里)는 만의 깊은 안쪽에 자리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안에 있는 개라고 하여 안개로도 불렀다.

형성 및 변천
내포리는 『호구 총수』[1789] 의하면 창원 도호부 서면의 내포리로 명칭이 확인되며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다. 1908년에는 창원부에 속하였고 1910년에는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창원군 구산면의 법정리인 내포리가 되었고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으며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내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내포리는 북쪽과 동쪽으로 산지가 있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고 있다. 남쪽 해안은 욱구만이 있고 닭섬과 작은 닭섬이 자리하고 북쪽 산지에서 발달한 소하천이 남으로 흘러 욱구만으로 유입한다.

현황
내포리는 구산면의 서쪽 중앙부에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석곡리와 수정리가 있으며 남쪽과 동쪽은 옥계리와 접하고 있다. 남쪽 욱구만을 따라서 해안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동쪽 경계선을 따라 구산로가 통과한다. 관내에는 미리·욱곡·여섬·내포 마을이 있고 이곳에는 예로부터 성산 이씨와 진양 강씨가 주를 이루며 살던 마을이었다. 마을 내에 진양 강씨의 삼효각과 김해 김씨의 충효렬 정여각이 세워져 있다. 2013년 3월말 기준으로 내포리의 세대수는 298호에 인구수는 659명[남 323명, 여 336명]이다.
[출처] [경상남도 마산시 구산면]내포리 [內浦里, Naepo-ri]|작성자 한맹

옥계리(玉溪里)

마을을 둘러싸듯이 우뚝 솟은 서쪽의 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玉과 같이 맑다고 하여 玉溪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엔 옥개(玉浦)라고도 불리었다.
본 마을은 남, 서, 북의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였고 동쪽만 바다에 접하여 있어 지형적 조건이 전형적인 어촌이다.
예부터 星山李氏 密陽朴氏 溫陽方氏 密陽孫氏 軍威方氏 旌善全氏 金海金氏 東萊鄭氏 등이 살고 있는데 入龜山祖가 溫陽方氏 12대, 星山李氏 12대, 密陽朴氏 9대라고 한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옥계리(玉溪里)는 마을을 둘러싸듯이 우뚝 솟은 서쪽의 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옥과 같이 맑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옥포(玉浦)이다.

형성 및 변천
옥계리가 속한 지역은 『호구 총수』[1789]에 칠원현 구산면 옥포리로 기록되어 있고 1895년(고종 32)에는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다. 1908년 창원부에 이관되었다가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 창원군 구산면에 속한 법정리인 옥계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옥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옥계리는 서쪽으로 욱구만이 자리하고 동쪽으로는 마산만과 진해만으로 통하는 바다가 있다. 옥계리가 자리한 곳은 남·서·북쪽의 삼면으로 산지가 병풍처럼 둘러 싸여 있고 동쪽 해안가로 멀리에 부도가 보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르는 산지 곳곳에 잘패 고개나 옥계 고개, 가장 고개 등이 있으며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서쪽과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한다.

현황
옥계리의 북쪽은 수정리가 있고, 북동쪽에는 내포리, 남쪽에는 난포리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과 서쪽 해안선을 따라서는 도로가 발달해 있으며 시가지는 해안가와 소하천 유역의 좁은 골짜기를 따라 발달해 있다. 관내에는 신촌과 옥계 마을이 있다. 2013년 3월말 기준 옥계리의 세대수는 191호에 인구수는 461명(남 214명|여 247명)이다.
[출처] [경상남도 마산시 구산면]옥계리 [玉溪里, Okgye-ri]|작성자 한맹

반동리(盤洞里)

반동(盤洞)리
옛날 마을 주변의 山林에 밤나무가 무성했다고 해서 밤의 마을 즉 율리(栗里)라 불렀다.
그 뒤에 동네 중심부에 지석묘가 7기나 있어 칠성안반(七星安盤)이라 하여 반동이라 명명되었다. 慶州崔氏의 집성촌이며, 본면 10개 법정리 중 남구산 6개리의 중심지라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다.(반동초교, 구남중, 구산보건지소 구산농협) 본면 인구의 2/3가 남구산에 살고 있다.
본 면에서는 가장 오래된 서당이었던 화병제는 약 250년전에 본동의 서쪽산인 화병산 아래에 위치하였는데 6.25사변때 소실 당하여 그 터만 앙상하게 남아있어 하루빨리 복원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반동리의 옛 이름은 율포리(栗浦里) 또는 율리(栗里)로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무성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반동리가 되었는데 이는 동리내에 7기의 고인돌이 있어 칠성안반(七星安盤)이라 하였으며 이를 줄여 ‘반동’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반동리가 속한 지역은 『호구 총수』[1789]에 칠원현 구산면 율포리로 확인된다.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고 1908년 창원부에 속하였으며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창원군 구산면의 법정리인 반동리가 되었고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으며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반동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반동리의 북쪽으로는 가장 고개와 봉화재로 이어지는 산지가 있고 동쪽으로는 준고개와 궁개 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성의 산지가 분포하며 서쪽으로는 옥녀봉이 자리한다. 리의 남쪽과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다.

현황
반동리의 북쪽으로는 옥계리와 남포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구복리, 남동쪽으로는 심리와 접하고 있다. 중심부에 7기의 지석묘가 있으며,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다. 관내에는 반동 초등학교와 구남 중학교, 구산 보건 지소가 자리하고 있다. 리의 세대수는 265 세대에 인구수는 438명[남자 216명, 여자 222명]이다.


구복리(龜伏里)

이 마을은 지형이 거북이 바다로 입수하려고 엎드려 있는 형국임으로 龜伏으로 명명되었다.
거북등의 위치는 마을 중심부이며 거북동산의 앞은 잘록한 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어 천연적으로 생긴 염전이어서 약 70여년전까지 경영했었다.
이 거북동산은 현재 구복리 104-1번지(임금택댁)조그마한 대밭이 있는 곳이다. 
-염전의 가마터-
이 마을에는 앞바다를 에워싸고 있는 섬들이 많다. (돝섬, 쇠섬, 자라섬, 북섬, 장구섬, 징섬, 납섬, 긴섬, 곰섬)
본 마을은 저도와 장구마을이 섭동을 끼고 있으며, 경주정씨가 10대조 나주임씨 10대조 김녕김씨가 12대조로 김씨와 임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전형적인 어촌으로 생계는 비교적 윤택한 편이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구복리(龜伏里)는 마을의 형세가 거북이 바다로 입수하려고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잉화리(芿火里)로 1789년 『호구 총수』에 기록되어 있으며 1873년의 『구산진 지도』에는 잉화곶으로 표기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구복리가 속한 지역은 『호구 총수』[1789]에 잉화리(芿火里)로 기록되어 있고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으며 1908년 창원부에 속하였다. 1910년 마산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창원군 구산면에 속한 법정리인 구복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구복리는 북쪽으로는 욱구만과 접하고 북동쪽에는 옥녀봉이 자리한다. 남서쪽으로는 저도[돗섬]가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다. 해안에는 돝섬, 쇠섬, 자라섬, 북섬, 장구섬, 징섬, 납섬, 긴섬, 곰섬 등의 여러 섬들이 에워싸고 있다.

현황
구복리는 구산면의 남서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반동리와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심리와 마주한다. 서쪽과 남쪽 해안을 따라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남서쪽의 저도와 연결된 연육교가 있다. 관내에는 구복 예술촌이 조성되어 있다. 자연 마을로는 장구 마을과 구복 마을이 있고 세대수는 240세대에 인구수는 534명[남자 292명, 여자 242명]이다.



심리(深里)


浦口灣이 깊은 곳에 자리했기에 심리라 했다. 이 마을은 예부터 晋陽鄭氏가 주인 격이고 月城李氏 驪陽陣氏 達成徐氏 坡平尹氏, 晋陽姜氏, 仁同張氏 등 이 居住하면서 半農. 半漁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본 면의 남단에 위치하므로 육상교통은 불편하고 해상교통이 발달하였으나 현재는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가 國道로 지정(2009년 1월)되어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한 가지 갸륵하게 여겨지는 것은 약 270년전부터 守護神으로 奉祀하고 있는 辛씨 할머니의 貞烈閣의 보존사업과 해마다의 제사에 온 동민이 정성을 다하고 있다니 동민들은 마땅히 복 받으리라. 

명칭 유래 / 심리(深里)는 포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 심리는 『호구 총수』[1789]에 칠원현 구산면 심리로 지명을 확인할 수 있으며,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 구산면에 속하였다가 1908년에는 창원부에 속하였다.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 창원군 구산면에 속한 법정리인 심리가 되었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었고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며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 심리는 북동쪽에는 난포만, 북서쪽에는 임상포가 자리하고 북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다. 리의 서쪽 경두산을 중심으로 전체에 산지가 분포한다. 남동쪽에는 실리섬과 초애섬이 있다.

현황
심리는 구산면의 남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리의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남동쪽 끝단에는 원전항이 자리한다. 주민의 생업은 반농·반어에 의존했으며 정열각(貞烈閣)[약 270년전부터 수호신으로 신씨 할머니를 모셔 놓음]에서 해마다의 제를 올린다. 자연 마을로는 심리 마을과 용호 마을이 있고 세대수는 193세대에 인구수는 393명[남자 204명|여자 189명]이다.


난포리(藍浦里)


아득한 옛날엔 오염이 없는 진해만의 바닷물은 푸르고 또 푸르렀을 것이다. 즉 짙고 검푸른 남색의 바닷물이 보이는 갯마을임으로 쪽빛남 개 포라고 불러왔음.(1592년 6월 16일 난중일기에는 난포(藍浦)로 기재 되어있음)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옛날에 卵抱였는데 일제시대 日人이 봉화산의 지형이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 귀인인 탄생할 것을 두려워서 남루할 난(藍)자 개 포(浦)로 변경하였다고 하면서 1993년 옛 지명 찾기하면서 난포(卵抱)로 마을 명을 환원하였다. 마을 뒤는 높은 산이요 앞은 바다로 탁 트인 남향의 浦口마을이라 생업은 수산업이 주이고 농사도 하고 있다. 주민은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나 경주이씨 온양방씨 등등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김해김씨 입구산조는 종손의 15대조라고 한다. 마을 뒷 산정에는 봉화대지가 있는데 한때 미사일기지가 주둔하였다.

2023년 4월 15일 난포항 풍경






[참고자료]